기록

[스크랩] 이생강에대하여

보고잡퍼 2007. 11. 6. 20:11
이생강 (대금)
1939년 전남 완도 땅. 나이 60의 초라한 노인이 한 권문에 초대되어 젓대를 불고 있었다. 지그시 감은 눈, 왜소한 체구. 고독한 삶의 음영이 엿보이는 노인은 서자로 태어난 출생의 고독함을 어쩌지 못하고 나이 열 여섯에 대나무 밭에 들어가 젓대 하나를 만들어가지고 나온 다음 그것과 더불어 산 평생에 대금산조 한바탕을 이루어낸 사람이었다.

노인의 젓대가락이 한층 무르익어 갈 즈음 젓대 아랫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마침 옆에 있던 기생이 이를 보고 노인의 젓대를 빼앗으려 하였으나 노인은 방해하지 말라는 시늉을 하면서 한동안 더 불고는 젓대를 쥔 채 쓰러졌다. 박종기(1879∼1939). 슬픈 죽음이었다. 아니, 외로운 삶을 젓대 가락으로 완성시킨 행복한 죽음이었다.

대금 산조 한바탕은 그렇게 생겨났으나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기까지는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러야 가능했으니, 그로부터도 한주환(1904∼1963) 이생강의 두 명인이 등장한 다음이다.

이생강은 1937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남의 나라 일본 땅에서 굳세게 살라는 뜻으로 생강이란 이름을 얻은 그는 어려서부터 입으로 부는 악기에는 남다른 재주를 보였다. 그의 나이 5세에 이웃에 살던 야마모토라는 척팔(일본 피리의 일종) 선생은 이 아이가 특히 피리에 재주가 있으니 꼭 피리를 가르치라는 당부를 그의 부친에게 아끼지 않았다. 자동차 운전으로 생업을 이어가던 생강의 부친 역시 가락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피리, 단소, 대금, 퉁소 등을 구해다주며 재동이란 소리를 듣는 아들의 길을 열어주고자 했다. 해방 이듬해 부산으로 나온 생강은 나이 아홉의 소년이었지만 소금, 피리, 단소, 퉁소, 태평소, 대금 등 6개 악기에서 소리를 얻어내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소년의 나이 열한살. [피리 부는 소년]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생강은 그해 여름 전주역 앞에서 아버지의 어물 행상에 손님을 끌기 위하여 피리를 불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정치 열기가 전국을 감싸고 사회 분위기는 한껏 시끄러운 해방 공간, 소년이 곡진하게 불어제끼는 피리 소리는 들뜬 군중들의 발길을 빼앗으며 고등어 한 손이나마 더 팔리도록 하는 바 있었다.

'허 참, 신통한 지고!' 보라빛깔 두루마기 차림에 콧수염을 기른 한 중년의 사내가 소년의 피리 소리를 한동안 듣고 나서 감탄을 금치 않는 것이었다. 한주환. 생강의 운명적인 스승이 된 사람이다.

전남 화순의 몇 평 땅에 씨앗을 뿌려 먹고사는 한주환은 이미 기울어진 중늙은 나이에 자손마저 두지 못하고 한 자루 대금에 의지해 이 땅 저 땅을 오가며 가락을 파는 인생이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그러나 그가 조선 팔도에서 예사롭지 않은 피리의 명인이라는 것을 눈치챘고 그날로 전주역 앞의 여관에 방을 내어 아들의 피리 소리를 지도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 20여일간, 소년에게 민요 언저리나 가르칠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 선생은 소년이 훗날 산조에 어떻게 눈뜨게 될 것인가를 요량하며 다짜고짜 자진모리로 산조의 기초를 가르쳐 주었다. 산조라 함은 진양조의 느린 가락에서부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의 빠르기로 익혀나가야 하는 법이거늘, 동가숙 서가식하는 선생은 어느 날의 길 위에서 만난 어린 제자와의 짧은 만남을 아껴 클라이맥스를 던져주고 사라져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떠나간 선생은 한 시절의 방랑벽이 곤고해질 때쯤이면 몇 년마다 한번씩 부산의 소년네에게로 찾아들었다. 슬프고 한스러운 것이었다. 평생 대금을 불어온 삶이었고 기량도 조선 팔도의 최고라는 소리를 들어왔건만 독주의 기회는 궁중악인 대금 정악에만 국한되고 주어지는 자리는 반주가 고작이었으니, 그 구차한 삶에 어린 제자를 보는 것이 크나큰 낙이었고, 그러나 날로 기량이 도드라지는 어린 제자를 보는 것이 또한 절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선생은 제자에게 가락이 전해진 바대로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응용과 활용을 거쳐 재창조되는 것임을 일깨워 주었고, 소년은 어느새 중,고등학교를 거쳐 전국의 무대에 불려다니는 몸이 되었다.

그 사이 생강은 고전무용음악을 연구하며 철가야금을 개량한 박성옥을 만나 무용음악에도 눈떴고 57년 진주 개천예술제에서는 기악부 특상을 받으며 새로운 시대를 열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말년의 선생(한주환)은 비참했다. 젊은 시절 한수동 으로부터 대금 풍류를, 박종기로부터 대금 산조를 사사해 자신의 유파를 이룩해내고 음반까지 남긴 몸이건만 [여성창극단]을 따라다니며 반주를 하거나 요릿집 드난살이를 하는 기구한 삶 끝에 위암으로 고통스런 60평생을 마쳤다. 15년을 가르친 제자는 군에 입대해 있었고 다만 유언을 통하여 자신에게 대금산조를 넘겨준 스승 박종기의 18분 산조와 자신의 32분 산조를 제자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제자가 정작 스승의 산조 진수를 알게 되는 것은 그 이태후 군 복무를 마치고 아쟁의 달인 한일섭씨를 만나 스승의 대금산조를 입수한 다음부터다. 스승이 남긴 산조 가락은 무한한 지평으로 펼쳐져 있었다. 그는 스승의 산조를 흠씬 빨아들이며 판소리 명창들과 함께 하는 생활에서 몸이 저리도록 우리 가락에 탐닉했다. 부산에서 성장한 그가 지역성의 한계를 넘지 못할 것이라는 남들의 비아냥을 이기고 남도가락을 중심으로 하는 산조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켰음은 물론 더 나아가 이생강류 대금산조를 남기게 됨은 전적으로 그의 노력이 그 주인에게 보답한 결과다.

그가 오늘날 자신의 스승 한주환과, 스승의 스승 박종기의 이름을 길이 빛내며 대금 산조의 한 역사를 장식하게 된 것은 스승의 유지를 받으려는 피나는 노력이 뒤따랐음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려니와 외국 언론의 평가에 힘입은 바 또한 크다.

1960년 우리 나라 최초로 [한국민속예술단]이 유럽공연에 올랐다. 프랑스 국립 사르베르나 극장. 단원들이 옷을 갈아입는 막간에 이생강은 연출자로부터 대금 산조를 연주할 것을 제의받았다. 막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즉흥 연주였다.

다음날 단원들은 놀랐다. 파리의 신문들은 정규 공연물보다는 막간의 대금 산조에 박수를 보내면서 "대나무가 뻗어가는 소리같은 자연의 극치"라는 찬사를 싣고 있는 것이었다. 막간 인생은 어느새 무대의 중앙으로 부상해 있는 거였다.

아직도 우리 나라엔 외국에서 인정하는 바에 따라 그 가치를 결정지으려 하는 미숙성이 상당부분에 남아 있다. 이생강의 대금이 과거와는 다른 수준으로 인정받게 되는 과정에도 그런 요소가 있었던 것이다.

78년 전주 대사습놀이에서 기악부 대금산조 장원을 차지한 이생강은 83년 드디어 이생강류의 대금 산조를 선보인다.

스승인 한주환의 가락에 바탕을 두고 대금 산조의 원조인 박종기 명인의 가락을 재현하면서도 남도 판소리 위에 경서도의 메나리조를 가미한 90분짜리 이생강류의 대금산조는 이름없이 떠난 대금의 명인들, 박종기와 한주환을 온당한 영예의 자리에 위치시키는 것이었다.

피리의 음은 바람소리다. 바람은 피리를 부는 사람의 숨결과 같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음으로 전해진다. 그 음의 기본적인 특성은 신비로움이다. 이생강의 산조는 음이 맑고 생동감이 넘친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른 연주자들에 비해 호흡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 소리가 좋다면 기본기를 잘 익혔기 때문입니다. 우선 소리내는 법인데 단전호흡을 하듯 뱃속에서 끌어낸 호흡이냐 목에서 얕게 뱉어낸 호흡이냐에 따라 소리가 완전 달라지지요. 저는 그 둘을 다 익혀서 때로는 그것을 섞어내기도 합니다. 또 바이브레이션에 있어서도 악기를 흔들지 않고 호흡과 몸짓을 이용하지요."

이생강은 타고난 체력과 음악성, 끊임없는 노력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 수준의 대금 명인이다. 연주에만 그치지 않고 대금음악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자 하는데 또한 대단한 열의를 가지고 있다. 대금 산조, 피리 산조, 퉁소 산조, 소금(강원풍류), 태평소 산조, 단소 산조에 걸쳐 3백60여장의 음반 을 냈다. 그가 무엇보다도 중시한 것은 연주력이다. 92년 대금산조 45호 중요무형준문화재로 지정된 그는 연주력에 있어 자신을 능가할 사람이 없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문화재로 지정된 스승으로부터 이수받지 않았다는 행정적 이유로 준문화재에 머물러 있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소리의 세계로 눈길을 돌리면 현실의 그런 불만은 끼여들 틈이 없다. 우리 소리의 깊이, 그것을 남겨준 스승들의 뜻이 한없이 높아보이기 때문이다. "몸에 절도록 스승이 만들어주신 대금과 더불어 살았지만 그럴수록 더 원형 다듬기에 애써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진정소리의 세계는 끝이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국민일보 1994.09.17 09면
출처 : 이생강에대하여
글쓴이 : 청울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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