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완도 신지도

보고잡퍼 2008. 1. 21. 14:50
완도 신지도
글쓴이 유리구두

지난 1969년 초 해남 북평면 남창에서 달도를 거쳐 완도와 다리가 놓였다.

2005년 말 신지도는 완도와 연륙되어 40분 뱃길이 5분 찻길로 단축됐다.

이듬해 120만 명이 신지를 찾았다.

육로를 통해 갈 수 있는 호남 최대 규모인 명사십리해수욕장을 찾는 피서인파였다.

신지도는 강진현 관할이다가 1896년 신설된 완도군 소속 면이 됐다.

본디 코끼리 코처럼 동서로 길게 생겨 ‘지섬’이었으나, 나주 지도와 혼동을 피하려 ‘신지도’라 했다고 한다.

15세기 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등장하는데, 新智島로 기록돼 있다.

18세기 이후 문헌에는 薪智島로 쓰고 있다.

섬의 중심부인 독고재(獨鷄嶺)를 중심으로 고인돌이 80여기 분포한다.

조선시대 말을 방목하는 목장이 있었다.

대곡리 삼마(三馬)마을은 옛 상마동(上馬洞)으로 양마지(養馬地)였다.

1681년 송곡리 옛 노루목(獐項串·장항관)과 진리(鎭里)에는 수군 만호진이 설치됐다.

남서쪽 가리포진과 북동쪽 고금도진의 사이로 최고봉 상산(象山·324m)의 지세를 이용한 천연 요새지다.

1872년께 군사진지를 표시한 강진 신지도 진지도(康津薪智島鎭地圖)에는 동헌과 내아를 비롯해 환향고, 세미고, 사령청, 이청, 장청, 객사, 군기고, 화약고, 샘(井), 집물고, 융물고가 그려져 있다.

호남읍지에 따르면 귀선(龜船)과 병선 각 1척, 사후선 2척, 군관과 진리(鎭吏) 각 35명, 사령 25명, 수군 384명이 배치됐다.

현재 1873년 세운 만호 박희화(朴熙和) 청덕비만 부두가 제방 위로 옮겨져 있다.

경평군 이세보(李世輔1832∼1895)는 안동김씨 세도정치 아래 관료의 부패와 사회현실의 불합리성을 비판하다가 1860년 신지도로 유배된다.

천리 유배 여정과 2년 동안 유배지 생활은 그가 남긴 신도일록(薪島日錄)으로 전한다.

한성을 출발하여 15일 만에 신지도 도착했다.

장성 갈재를 넘어 북창을 거쳐 나주 영산강을 건너 영암에서 숙박 다음날 강진읍에 도착, 뱃길로 마도진 고금도를 거쳤다.

경평군의 한 서린 울음소리가 모래등에서 울어 ‘울모래(鳴沙場)’가 됐다는 설도 있다.

우두(牛痘)연구를 했던 지석영(池錫永1855∼1935)도 1887년 신지에 유배됐다.

그의 호 송촌(松村)은 한글로 예방의학서인 ‘신학사설’을 썼던 송곡에서 땄다.

장석천은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지도했고, 임재갑은 신지도강습소사건으로 알려졌다.

이를 기려 1994년 대곡리 구릉에 신지항일기념탑을 세워졌다.

1970년대 김, 1980년대 미역과 톳, 1990년대 어류축양사업이 주류를 이뤄가는 신지도는 현재 1천4백 세대 4천여 명이 살고 있다.

2천억원 규모의 광어를 알리기 위해 명예 넙치(廣魚)면장을 모집했고, 조선대 부설 해양생물연구센터가 곧 문을 여니 바다목장이 될 터다.

/김경수(사)향토문화진흥원장